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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4u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12-07-14 15:56:59, Hit : 89)
가난한 자와 복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

구약성경에서 나사렛은 거의 언급이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적은 마을이다. 고작해야 수백 명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님이 사셨고, 회당이 있어 안식일마다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구약)을 읽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 회당에 초대되신 예수님은 이사야 61:1-2을 읽으셨다.  그리고 앉아서 그 말씀을 설명하려 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나사렛 청년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에 자못 궁금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 즉 현실로 실현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메시아시라고 주장하셨다(21절).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될 것을 예견하였으나 그 완전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낮아지심, 그리고 높아지심의 메시아직의 기능으로 될 것을 가르친다.
  
이제 본문에서 몇 가지 의문점을 찾아 설명함으로 예수님의 메시아직의 중요한 기능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로 하자.
  
먼저, 예수님이 하신 오늘날(Today)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구원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셨다. 여기서 분명히 밝히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고, 메시아의 활동시기가 왔다는 뜻이다.1)  다시 말해서 그 백성이 오랫동안 바랐던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가난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왜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인가? 복음이 좋은 소식이요, 죄인에 대한 구원의 소식이라면 만민에게 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가난한 자는 물론 문자적인 뜻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 대부분이 가난한 자들이었음이 그 증거다. 그러나 꼭 문자적인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가난은 궁핍하다고 생각하는 자요,2)  갇힌 자, 소경, 압제받는 자로 특별히 하나님께 의존해서야 살 수 있는 자들을 가리켰다.3)
  
특별히 유대주의에서 가난 한자는 단지 먹을 것이 없는 물질적 가난을 의미하지 않고 차라리 권세가 없는 자였다. 이런 이들 중에는 천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포함되었다.  세리와 창기같은 이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부정하게 돈을 벌기 때문에 그런 돈은 하나님께 바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은혜를 받을 수 없었으며 정죄만 받을 뿐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가난 한자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궁핍한 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주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자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쉽게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사람, 하나님을 기쁘게 바라는 사람 그리고 그의 자비를 의지하려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가난한 자만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게 되므로 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무엇인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그리고 눌린 자에게 자유케 하신다는 말씀은 문자적인가?  메시아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눌린 자를 위한 해방자신가? 많은 유대인들은 이 말씀이 저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지배에서 그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것을 예언한 메시아적 사역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시는 데는 관심이 없으셨다. 또 사회 개혁이나 경제적인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보시 지도 않았다. 물론 그의 교훈은 용서와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관계에 관한 것이어서 사회의 도덕적인 개혁이나 인간 개조에 큰 몫을 담당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역은 주로 영적이었고 영혼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영적으로 구원을 받으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가 새로워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에 사회적 관심을 포함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가 지적하였듯이 선한 행실이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에게서 선행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정치 체제나 사회제도에 보다 개인의 영혼에 관심을 두셨다. 여기서 좋은 소식은 구원의 소식이요, 죄에서의 구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물론 정치나 사회, 그리고 경제 전반에 걸쳐서도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복음은 예수님의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려 오셨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전적으로 거지와 같은 상태를 느끼는 가난한 자만이 궁핍을 면하며 믿음의 눈을 뜨며 비참함에서 놓여나게 된다.4)  여기서 자유케 한다, 놓여난다는 뜻은 어떤 정치적인 압력에서 해방된다는 뜻이 아니라 용서, 특별히 죄에서 용서의 의미로 쓰였다.5)  메시아의 사명은 죄의 용서요 죄에서의 구원이다.

   주
   1. W. Neil and Travis, More Difficult Sayings of Jesus, p.98
   2. W. Hendriksen, The Gospel of Luke. p.252
   3. Walter L. Liefeld, Luke(E.B.C. Vol 8), p.867
   4. R.C.H. Lenski, Luke. p.250
   5. Joseph A. Fitzmyer, Luke I-IX. Doubleday, 1972. p.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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